어젯밤 11시 쯤에 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들지 않았다. 대상포진 1차 접종을 한 아내는 한기가 드는지 계속 "추워! 추워!"를 연발했다. 아내에게 타일레놀을 복용케 하고, 난 책상 앞에 앉았다. 조일구 장로님도 잠을 못 주무시고 계시는지, 내가 보낸 카톡에 자정이 넘은 시간에 답을 주셨다. 새벽 2시 쯤에, 뉴욕일보에서 내가 쓴 글이 실린 오늘자 신문의 PDF 파일을 보내주셨다. 새벽 3시 쯤에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들지 않아 많이 뒤척였다. 몇 시 쯤에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3시간 정도나 잤나?
9시 3분 전이다. 이제 장지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
George Washington Memorial Park에 도착하니 9시 30분이었다. 하관 예식에 참석하러 온 조객들 중에는 우리가 일착인 것 같았다. 예배는 이기백 목사님께서 인도하셨다. 엄숙하게,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 헌화만 했다. 하관을 하지도 않았고, 취토(取土) - 관위에 흙을 뿌리는 행위 - 도 하지 않았다. 모두 고인의 뜻에 따른 것임은 물론이다. 오전 10시에 장지 사무실 앞을 출발하여 헌화까지 마쳤을 때, 11시도 되기 전이었다. 11시 30분에 점심 식사를 하기로 식당에 예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허봉기 목사님께서 하관 예식에도 참석하셨다. 오늘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자동차를 서울갈비 @Paramus, NJ 주차장에 세워놓고, 로데오꽃집 @Palisades Park, NJ에 전화를 걸었다. 조화 대금 결제를 위해서였다. 내가 $ 250 X 4점, $ 450 X 1점을 합하여 모두 5점의 조화를 주문했었다. 어제 결제를 해드릴 시간이 없어, 오늘 해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했었다. 신용 카드로 $ 1,450을 결제해 드렸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깐 외출을 했다. 내가 쓴 "고 조정칠 목사님을 기리며" 가 실린 신문들 - 뉴욕일보와 뉴욕한국일보 - 을 픽업하기 위해서였다. 뉴욕일보에는 "고 조정칠 목사님을 기리며"가 실려 있고, 뉴욕한국일보에는 "고 조정칠 목사님을 기리며 (2)"가 실려 있다.
고 조정칠 목사님의 원활한 장례 절차 진행 - 조가 연습 등 - 을 위하여 만든 단톡방에 짤막한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그 방에서 나왔다. 내가 만든 단톡방인데,그 방은 이제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졸음이 밀려왔다. 어젯밤에 잠을 3시간 정도 밖에 못잤었다. 오늘 더위에 힘들기도 했었다. 내가 여름용 검정 예복이 없다. 두꺼운 천으로 된 양복을 입고 있었으니, 몸에 땀이 비오듯 흘렀다. 집에 와서 옷을 벗으니 셔츠가 홍건히 젖어 있었다.
침대에 누웠다. 두어 시간 정도를 푹 잤다. 설옥자 사모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목사님의 연락을 받고 오셨다는 분들이 가장 많으셨습니다" 라시며, 감사해 하셨다. 나는 단지 연락을 드렸을 뿐이다. 고 조정칠 목사님의 목회 여정과 인품이 그 분들의 발걸음을 옮겨 주신 것이다. 난 그렇게 믿고 있다.
고 조정칠 목사님의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치고 나서, 섭섭한 생각이 드는 곳이 있다. 뉴욕한인목사회에서 조화를 보내오지 않았다(뉴욕한인목사회에서 조화를 보내주셨는데, 만약 내가 보지 못한 것이라면, 정중히 사과드린다). 고 조정칠 목사님께서는 뉴욕한인목사회장을 연임하셨다. 뉴욕한인목사회장을 연임하신 분은 고 조정칠 목사님이 유일하시다. "내가 첫 번째 임기를 마쳤을 때, 부회장이 회장으로 가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회원들이 한번 더 하라고 해서, 두 번을 하게 됐습니다." 라셨다. 회장을 연임하신 분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크게 든다.
오후 7시 반이다. 오늘 저녁 여물(?)도 먹었으니, 이제 일을 시작하자.